그 남자의 손 #Dating


반짝이는 순간은 항상 짧으니까. 잊기 전에 기록해야 해. 다시 들춰보고 싶어질 때는, 분명히 다 끝났을 때일 테니까.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. 가장 행복할 때 가장 불행한 장면을 생각해내는 것. 전부 좋아하다가도, 아 이걸 잃으면 얼마나 아파할지, 그런 것들을 줄지어 생각해 버린다. 매력없지. 그렇지만 고칠 수가 없다.

이미 떠나간 남자에 대해 생각해 본다. 돌이켜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건 그 남자의 따뜻한 손이다. 그는 서투르게 손을 잡았다. 물집이 난 발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. 내가 고맙다고 이야기했었나. 그 뒤로는, 기억하기 싫은 싸움뿐이었나. 그렇지는 않았다. 분명 즐거웠던 것 같다. 그렇지만 단 한번도 눈앞에 있는 남자가 강인해 보였던 적은 없었다. 그는 여리고, 약했다. 내가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어깨 한 쪽을 내어줄 수 있었을 것 같다. 그리고 그런 여자였다면 그 남자도 조금 더 행복했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서도.

그를 만나면 만날 수록 나는 불안정해졌다. 그는 내 안의 불안과 우울을 끄집어내는 남자였다. 울고 싶을 때 그와 이야기하면 통곡하고 싶어졌고,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 것도 못 버텨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. 연애가 끝났을 즈음에는 이상하게도 해방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. 한 달 정도는 그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. 그가 남겨둔 잔해들 위로 간신히 비집고 올라와서야, 숨을 쉴 수 있었다.

그래도 반짝이는 순간들이 좀 더 있었던 것 같다. 그와 어쩌면 사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날 밤 이외에도, 충분히 행복했던 순간들이 없지는 않았다. 그렇지. 그는 젓가락질을 아주 잘 했다. 생선살을 가볍게 발라내서 내 밥숟가락 위에 가만히 얹어주었다. 해물찜을 먹으러 가면, 콩나물 틈에서 가장 맛있는 부위를 찾아서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. 그래, 그러고 보니 다정한 말도 잘 했던 것 같다. 그는 이따금 나를 아주 눈부시게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. 예뻐. 정말 너무 예뻐서,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고.

그 무더웠던 날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. 부산여행을 갔던 날이었다. 더위에 지쳐 그대로 늘어진 내게 그가 말했다. 

"맥주 마시고 싶지?"
"응. 그치만 힘들고..."
"사 올게."
"너도 힘들잖아. 같이 가."

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.

"됐어. 금방 다녀올게."

돌아온 그는 검은 봉투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, 내 손에 쥐어주었다. 우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들만큼 간절하게 그 맥주를 마셨다. 생색내기를 좋아하는 그 애였지만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. 고마워, 하고 말해도 씩 웃을 뿐이었다.

모든 기억 속에 그 애의 손이 있다. 젓가락질 하는 손, 예쁘게 나이프질을 하던 그 손, 와인잔을 섬세하게 흔들던 손, 수줍게 내 손을 잡아오던 그 손. 마지막은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. 그저,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. 그 애도 아프고 괴로워서, 다른 여자를 만났던 거겠지. 이렇게까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어쩌면 지금 내가 다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. 얼마 전까지는 굉장히 화가 났었으니까.


지금 나는 아주 행복한 것 같다. 이 순간이 계속되면 좋을 텐데.




1 2 3 4 5 6 7 8 9 10 다음